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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경제

정주영 가계도 정주영 정몽필 정몽우 정몽구 정몽근 정몽헌 장남 아들 이양자 여동생 현대그룹 가계도 알아보기

by chickyu 2018.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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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현대그룹의 정주영회장과 현대그룹에 대해서 알아보는 포스팅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그룹의 창업자입니다. 이병철회장과 함께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의 상징이자 경제 성장과 산업화의 상징 중 한명입니다. 현대사에서 가장 밑바닥부터 최정상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오늘 알아볼 내용은 정주영 가계도, 정주영, 정몽필, 정몽우, 정몽구, 정몽근, 정몽헌, 장남, 아들, 이양자, 여동생, 현대그룹 가계도 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경제인, 그리고 현대그룹의 명예회장인 정주영. 어떻게 보면 통일 운동가이기도 합니다. 동생들과 아들들이 모두 회장이고 현대가 특유의 기업문화 때문에 왕회장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업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98년 소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까지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1951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보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2녀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호는 고향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딴 아산 입니다.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병원도 바로 이 호를 딴 이름입니다. 이것은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온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충남 아산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송전소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즉 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집안의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있으며, 서울에서 경리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도로 끌려간 적도 있습니다. 이 때 아버지는 "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라면서 타일렀다고 합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판단은 틀렸지만,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아주 일리없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일을 해 돈을 벌며 서울에 정착했습니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 본관 공사장, 용산역 근처 풍전엿공장 등에서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노름에 빠진 외아들에게 실망한 쌀가게 주인이 성실하게 일해온 정주영에게 가게를 매도하여 3년 뒤 쌀가게 '경일상회'를 차렸다는 사실은 유명합니다. 하지만 얼마 후 일제가 쌀배급제를 시행하면서 자연스레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이후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화재로 건물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주역들 중 하나인만큼 과거 가난과 보릿고개를 처절하게 겸험했던 어르신들에겐 뇌리에 깊이 남아있는 인물입니다. 또한 금수저에 대한 반감이 큰 우리나라에서 소학교 졸업이라는 보잘것 없는 학력으로 자수성가한 그는 유일한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몇 안되는 기업인이기도 합니다. 6.25 전쟁 시기에 피난하여 부산에서 건설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현대그룹의 토대가 되는 현대 토건입니다. 당시 은행에서 큰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자동차 수리공장 사장이 순식간에 건설사를 세운 것입니다. 회고록에 의하면 미군으로부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한겨울에 미군 묘지에 잔디 입히는 일을 발주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의 여건상 겨울에 잔디를 구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전부 거절한 것을 정주영은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일단 파란 풀로만 덮으면 된다는 확인을 받은 후 트럭 30여대를 동원해서 밭에 나있는 보리 싹을 사다가 심어서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고 합니다. 이후 겨울이 지나자 보리는 전부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이일이 화제가 된 후 미군으로부터 많은 일을 발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사업규모를 확정하여 현대 그룹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한국의 건설업계 역사에서 이 사람의 행보는 그야말로 신화적입니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서 유럽을 돌았다고 합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를 건립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짓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해봤지만 이번만은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내며 "무조건 해내라"고 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임에 견디다 못해 해외 온갖 곳을 돌며 허풍을 쳐서라도 어떻게든 조선소 지을 돈을 빌리고자했던 정주영 회장의 눈물겨운 스토리입니다.

정주영은 많은 성공스토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년의 자식들의 상속경쟁과 죽음 등 안좋은 일들을 많이 격었습니다.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불화를 해소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죽기 직전에는 3부자 동반퇴진을 통해 이사회, 전문경영인 중심의 투명한 경영을 천명하였으나 그 직후 2001년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떄가 향년 85세. 그리고 현대가는 현대백화점,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으로 삼분되었습니다. 이는 세 아들편에 각각 줄을 섰던 여러 가신들의 농간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차남이자 현대자동차 그룹을 이끌고 있는 정몽구는 이를 증오하여 선대의 가신을 모두 가차없이 쳐냈고, 상당기단 동안 어떤 가신도 진심으로 믿지 않는 태도를 보여 일명 무원칙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매년 그를 기리며, 그의 기일에 생전에 머물던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서 자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고업그룹, 현대학원에서 추모식을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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